인생을 살다보면 세번의 기회가 있다는 말들을 흔히 한다. 그 기회를 확실히 잡는 이들도 있고, 또는 기회가 왔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일가를 이룬 이들은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손에 꼭 잡은 사람일 게다. 차범근에게 있어 1978년 5월의 저팬컵 출전은 어쩌면 인생에 단 세번만 온다는 극적인 터닝 포인트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차범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저팬컵의 활약을 바탕으로 꿈에 그리던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하는 길을 열게 된다.
 

주간스포츠 78년 11월 29일자 커버는 서독에 진출하는 차범근의 이야기를 커버에 다뤘다.


 ◇저팬컵이란 무엇인가


 일본은 78년 5월 저팬컵이란 이름으로 야심적인 국제축구대회를 개최한다. 60년대와 70년대 말까지 아시아권의 국제축구대회는 메르데카컵(말레이시아) 킹스컵(태국) 박대통령컵(한국)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은 그때도 다른 아시아 국가를 압도하는 경제대국이었지만 변변한 국제축구대회를 유치하지 못했다. 일본축구협회는 처음 개최하는 저팬컵의 성공을 위해 일류팀들의 초청에 공을 들였다. 브라질 1부리그의 파우메이라스, 서독 분데스리가의 IFC쾰른과 보루시아MG, 잉글랜드의 코벤트리 시티 등 명문 클럽들이 초청됐고 일본 한국 태국에서는 국가대표팀이 출전했다 일본은 1,2진 두 팀이 나서 출전팀은 총 8개가 됐다. 당초 메르데카컵을 개최하는 말레이시아도 초청됐지만 거부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한국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파우메이라스와 보루시아MG, 일본 2진 등 세팀과 대결하게 됐다. 차범근이 처음으로 분데스리가와 조우하는 대진이 이뤄진 것이다. 그것은 정녕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78년 박대통령컵을 앞두고 주간스포츠는 9월 27일자 커버로 차범근을 실었다.


 ◇앞다퉈 차범근을 탐내는 브라질과 독일의 명문 클럽들


 한국은 파우메이라스와 1차전에서 0-1로 졌고, 보루시아MG와 2차전에서도 2-3으로 패했다. 한국은 비록 명문클럽과 두 경기에서 모두 무릎을 꿇었지만 차범근의 존재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두드러졌다. 파우메이라스와 보르시아MG의 감독들이 약속이나 한 듯 차범근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당시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우선 파우메이라스전이 끝난 뒤 죠르쥬 비에이라 감독의 반응이다.(주간스포츠 78년 5월 24일자)


 <비에이라 감독은 "그렇게 기동력이 뛰어난 한국선수들 중에서도 백넘버 11번(차범근)의 스피드와 돌파력은 정말 대단했다"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차범근 정도의 선수라면 지금 당장 브라질 프로팀 중 어느 팀에 갖다 놓아도 손색 없이 경기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며 "최전방 공격진에서 차범근이 스피드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저팬컵에서 만난 두번째 상대였던 보루시아MG의 우도 라테크 감독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주간스포츠 78년 6월7일자 164호)

 <라테크 감독은 "나는 지금까지 서독에서 생각할 때 동양인으로서 축구를 제일 잘하는 선수는 오쿠데라(일본을 대표해 차범근보다 먼저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선수)인줄 알았는데 한국팀과 경기를 치르고 보니 오쿠데라는 정작 2류급 선수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중략)특히 차범근에 대해서는 칭찬이 많았다. 첫째 스피드가 좋고 둘째 돌파력이 있으며 셋째 슈팅 자세가 안정돼 있었고 넷째 개인기가 다듬어져 있고 다섯째 경기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라테크 감독은 차범근을 가르켜 "지금 당장 우리 팀에서 쓰고 싶은 선수"라고 말했고 이 말은 일본 히로시마에서 발행하는 '주고쿠 신문'에도 실렸다.>

 차범근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흔히 상대 팀 감독이 말할 수 있는 '립 서비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도 해외 유수의 명문클럽들이 한국 클럽팀과 경기를 할 때 국내 취재진을 향해 한국선수들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좋은 말을 하는데 돈이 드는 것은 아니다. '립 서비스'는 상대팀 감독들이 할 수 있는 미디어용 멘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차범근의 경우는 달랐다. 차범근의 플레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라테크 감독은 독일에 돌아가서도 '동양의 특출난 한 선수'에 대해 똑같은 평가를 이곳 저곳에 털어 놓았고, 그해 제7회 박대통령컵을 앞두고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을 평가하기 위한 스카우트가 한국으로 날아오게 됐다.
 

저팬컵에 출전하는 차범근을 78년 5월 31일자 주간스포츠가 표지에 실었다.


 ◇차범근, 분데스리가로의 길을 뚫다

 당시 차범근은 공군 소속이었다. 공군을 제대한 뒤의 행보는 포철 입단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차범근도 자신의 거취에 대해 "포철로 가는 것만이 내가 갈 길"(주간스포츠 78년 9월 27일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다만 당시 현대가 차범근을 스카우트한다는 전제 아래 축구팀 창단을 준비하고 있었다.(나중 얘기지만 차범근의 스카우트에 실패한 현대는 축구팀 창단을 포기했고, 결국 현대가 축구계에 들어온 것은 슈퍼리그가 출범한 뒤인 83년 12월이었다. 차범근을 놓치면서 현대는 예정보다 5년 늦게 축구계와 인연을 맺었지만 분데스리가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차범근은 91년 현대의 감독으로 국내 무대에 복귀했으니 세상사는 돌고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루시아MG의 라데크 감독은 독일에 가서도 일본에서 본 '동양 선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얘기에 관심을 가졌던 프랑크푸르트의 슐트 코치가 차범근의 기량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박대통령컵에 맞춰 내한했다. 슐트 코치가 직접 본 차범근의 기량은 역시 대단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차범근을 분데스리가에 데리고 가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요즘이야 축구선수들이 조금만 잘 해도 '해외로 보내라'는 여론이 들끓지만 그 때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비록 종목은 다르지만 선동렬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을 시도했던 95년께만 해도 국내 일부 신문에서 '국보 유출사건'이라는 평을 내놓은 것과 비교하면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가느냐 마느냐가 화제가 됐던 78년의 상황은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한마디로 해외 진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꽤나 높았던 것이다.

차범근이 넘어야 하는 일차적인 벽은 국내의 여론이었던 셈이다. 차범근 해외 진출의 일차적인 키를 쥐고 있었던 대한축구협회는 비유하자면 '국보 유출'에 대한 세간의 여론을 떠볼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축구협회는 차범근의 서독행을 공식적으로 허가했지만 정작 그가 서독 땅을 밟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남아 있었다. '차범근 서독 프로축구팀으로 간다'는 제목의 주간스포츠 78년 11월 22일자 188호의 기사를 한번 들쳐보자.


 <차범근의 서독행을 축구협회가 허락했다. 지난 9월 박대통령컵 축구대회를 계기로 나돌기 시작한 차범근의 서독 프로축구팀 입단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중략)프랑크푸르트의 슐트 코치는 지난 9월 박대통령컵 때 차범근을 보기 위해 일부러 서울까지 왔던 것이다. 박대통령컵에서 차범근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스카우트를 결심한 슐트 코치는 차범근을 만나 구체적인 교섭을 벌였으나 차범근은 이때 확답을 하지 않았다. 서독에 돌아간 슐트 코치는 편지를 통해 다시 차범근의 의향을 물어 왔으며 이때부터 프랑크푸르트측에서는 프로선수 스카우트와 소개업을 본업으로 하는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에이전트라고 할 수 있다)'반듀즈' 스포츠 용구회사를 표면에 내세웠고 차범근도 독일어에 능한 박동희 건국대 교수에게 교량역을 의뢰했다.>


 

 하지만 공군 소속이자 국가대표팀의 주축이었던 차범근은 분데스리가로 가는 길목에 예기치 않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 피말리는 과정은 다음 주에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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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리 헤빈, 잭 캔필드의《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