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붐의 영웅시대'는 이제 1977년으로 넘어간다. 1977년은 월드컵의 해였다. 적어도 한국축구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이 일년내내 벌어지면서 축구팬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한국축구는 또다시 월드컵본선 진출의 대망을 품고 77년 한해를 내달렸다. 차범근은 바로 그 맨 앞에 있었다. 주간스포츠 1월 5일자 신년호에서 특집화보로 다룬 '새해의 꿈'은 한국축구의 이런 소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차범근이 월드컵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모조컵을 이용한 연출사진이었다. 한국축구에 이런 일이 언제쯤 가능할까.


 ◇차범근,월드컵을 높이 치켜들다.(77년 1월5일자 92호)


 사진을 먼저 보자. 차범근이 월드컵을 번쩍 들어올리면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아,이게 무슨 장면인가. 물론 이 사진은 실제 상황이 아니다. '새해의 꿈'이라는 신년특집 화보의 컨셉트에 맞춰 연출한 사진이었다. 차범근이 치켜든 월드컵은 물론 모조일 터이다. 월드컵 본선 진출이 목표인 한국축구였지만 '꿈을 크게 가져라'는 말처럼 아예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연출을 시도한 배포가 재미있다.
 이 사진 설명에는 차범근의 간략한 새해 소망이 적혀있다. '대망의 월드컵(FIFA컵)을 높이 쳐들게 되고 싶다. 올해는 아르헨티나월드컵대회(내년 6월)의 예선이 치러지는 해. 월드컵 쟁취를 위한 험난한 전초전에서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르헨티나월드컵은 차범근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 지역 예선전이 됐다. 차범근은 1973년 서독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 약관의 나이로 출전했고, 4년 뒤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는 당당히 팀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1982 스페인월드컵과 1986 멕시코월드컵 지역 예선에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있던 관계로 힘을 보태지 못했지만, 나중에 멕시코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다시 7년여만에 대표팀에 복귀해 꿈에 그리던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게 된다.
                                                       

주간스포츠는 77년 3월 9일자에 100호특집으로 당시 가장 인기있던 차범근 염동균 펠레(오른쪽부터)를 동시에 표지 인물로 내세웠다.

 차범근은 여전히 월드컵의 꿈을 꾸고 있다. 기자는 지난 2월 수원삼성의 가고시마 전지훈련 캠프를 동행 취재했다. 차범근 감독과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때에도 '차붐'은 월드컵의 꿈을 이야기 했다. 당시 스포츠서울에 쓴 기사를 잠시 인용해본다.
                                 
 <차 감독의 마음속에는 꽁꽁 숨겨놓았던 꿈이 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국내 축구의 현실에서 보면 황당하게도 들리는 이야기지만, 차 감독은 매우 진지하게 이 꿈을 생각하고 있다. 지난 1978년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독일에 진출했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최근 어느 팬이 인터넷에 당시 내가 독일로 떠나면서 인터뷰했던 동영상을 어떻게 구해서 올렸다. '선진축구를 배우고 나서 후진 양성에 힘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정말 그런 말을 했었다. 지금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한다."
 그가 만든 '차범근 축구교실'은 벌써 18년의 연륜이 쌓였다. 이제 '차범근 축구교실'의 이름 아래로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팀까지 만들어져 있다. 처음 축구교실이란 것을 만들었을 때는 생소했던 개념이었지만 이제는 곳곳에 축구교실이 생기고 어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볼을 차고 있다고 설명할 때는 '먼저 간 사람'다운 긍지를 숨기지 않았다. 차 감독은 "(대중화된)축구교실을 통해 어릴 때부터 성장한 아이들 가운데 재능이 있는 선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면 된다. 이렇게 쌓이고 쌓이면 내 세대가 아니더라도 어느 세대에서는 월드컵 우승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30여년전 '모조 월드컵'을 치켜들고 새해 소망의 화보를 찍었던 청년 차범근은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에서도 여전히 월드컵을 꿈꾸고 있었다.
                                                        

주간스포츠 77년 3월 23일자는 이스라엘과의 맞대결을 앞두고 양팀의 주전 멤버를 커버에 실었다. 가운데가 차범근이며 오른쪽은 김강남 정남 쌍둥이 형제들이다.


 ◇세계최강과 겨루려면 개인기 더 길러야(77년 3월30일자 103호)

 지금은 아시아에 4.5장의 티켓이 주어지지만 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국가를 합쳐서 단 한 자리가 주어졌다. 지금보다 휠씬 더 월드컵 무대를 밟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라. 2010 남아공월드컵에 아시아에서 단 한 나라만 나설 수 있다면 한국이 출전한다는 보장이 있겠는가. 아마도 많은 축구팬들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할 것이다. 당시에는 월드컵에 출전하기가 어려웠고, 그만큼 본선을 향한 국민적 열망도 컸다.


 77년의 지역 예선은 두 단계로 걸쳐서 진행됐다. 아시아지역 예선이 4개조로 나눠 먼저 벌어진 뒤 각조 1위팀이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에서는 아시아 4개팀과 오세아니아대표 1개팀 등 총 5개팀이 홈 앤드 어웨이로 바늘구멍같은 아르헨티나행 티켓을 다퉜다. 한국은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이스라엘 일본과 함께 2조에 배정됐다.
 최정민 감독이 이끌던 한국은 2월 27일 이스라엘과 원정경기서 0-0으로 비긴 뒤 3월20일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3-1로 대승을 거두며 아르헨티나월드컵을 향한 힘찬 행군을 시작했다. 주간스포츠는 이스라엘전이 끝난뒤 승리에 도취할 때가 아니라며 한국팀의 허와 실을 분석하고 있다.
 
 <최은택 전 국가대표팀 코치는 "전체적인 전술에 있어서는 크게 잘못된 것이 없었지만 부분 전술에 있어서는 몇가지 허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최 코치는 그 첫 번째로 "미드필더의 공격 가담이 늦기때문에 차범근이 외로운 상태에 놓일 때가 많이 있었다"고 했다. (중략) 처음부터 "수비벽을 두텁게 했다가 역습의 기회를 살리겠다"(최정민 감독의 말)는 작전이었다면 외로운 차범근을 도와주는 전술도 마련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모처럼 인터셉트해서 때려준 볼을 잡은 차범근이 적진에서 고군분투하다가 공격 찬스를 무위로 끝내 버리는 것은 최 코치가 아니라도 누구나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선제골을 포함해 1골2도움을 기록하며 난적 이스라엘을 3-1로 꺾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다. 차범근의 선제골에 대한 평을 들어보자.
 
 <어시스터로서,골게터로서 그의 위치는 이제 더없이 확고부동해졌다. 공백 지역을 차고 달리는 돌파력 하나만 뛰어나다고 혹평을 일삼던 일부 축구인들도 이제는 그의 뛰어난 기량과 툭 터진 경기안(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주간스포츠 4월6일자는 일본과의 결전을 앞두고 양국의 대표 공격수 차범근과 가마모토를 표지에서 대비시켰다.


 ◇차범근 눈독 들이는 외국 프로축구팀(77년 4월13일자 105호)


 77년 차범근은 군팀인 공군 소속이었다. 지난 주에 소개했듯이 서울신탁은행과 자동차보험 사이에서 '이적 파동'이 벌어지자 차범근은 백의종군을 선언했고, 무적 신분으로 박대통령배 국제대회를 뛴뒤 76년 10월초 공군에 입대했다. 군인 신분이었던 차범근에게 관심을 보인 팀은 캐나다의 화이트캡스였는데 그 내막을 한번 살펴보자.
 
 <한국축구 최고의 스타 차범근이 외국 프로팀으로부터 입단교섭을 받고 있어서 화제. 현재 공군에 복무중이라 외국 프로팀에 입단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국의 차범근이 국제적으로 그만큼 유명해졌다는 것은 국내 축구팬으로서 가슴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얘기의 발단은 카나다 프로팀 화이트 캡스의 크라우츤 감독이 선수 스카우트차 지난 3월 영국에 갔을 때부터 비롯된다.
 68년도에 잠깐 한국청소년팀 코치를 맡았었던 크라우츤 감독이 영국의 맨체스터 시티 팀 감독 토니 북씨에게 "좋은 선수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자 토니 북 감독은 "좋은 선수를 왜 유럽지역에서만 찾으려고 하느냐"고 하며 한국의 차범근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한국에 와서 차범근이 속한 화랑과 두차례 경기를 가졌던 맨체스터 시티 팀의 토니 북 감독은 그때 이미 차범근의 기량을 눈여겨 봐 두었으며 지난 2월 한국대표팀이 이스라엘과의 월드컵 예선을 치르기 위해 텔아비브로 가는 도중 싱가포르에서 또한번 차범근의 경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팀과의 친선경기 장면에서 차범근의 두드러진 기술과 능력을 인정한 토니 북 감독은 이 얘기를 크라우츤 감독에게 해주었다.>
 
 크라우츤 감독은 한국내 지인에게 연락해 차범근의 영입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군 복무중이어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이전에도 차범근이 홍콩 프로팀으로부터 파격적인 영입 제의를 받았던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차범근은 결국 이듬해 저팬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당시 최고의 리그로 꼽히던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하게 된다.
                                               

주간스포츠 77년 4월13일자 커버는 차범근이 일본전에서 귀중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는 순간을 담았다.


 ◇임기응변에 약한 일본 알고도 못꺾은 작전부재(77년 4월13일자 105호)


 아시아지역 2조에서 이스라엘에 1승1무로 앞선 한국의 다음 상대는 일본이었다. 한국은 3월 26일 도쿄 원정경기에서 0-0으로 비긴 뒤 4월 3일 서울에서 벌어진 홈 2차전에서 종료 6분전 차범근의 귀중한 페널티킥으로 1-0으로 신승하며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비록 일본을 꺾고 최종예선에 올랐지만 아슬아슬한 승리탓에 경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논조가 많았다. 아무래도 최종예선이 걱정됐기 때문이리라. 특이한 점은 페널티킥의 키커로 차범근이 나섰다는 점인데 널리 알려졌듯이 그는 'PK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차범근과 페널티킥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힘겨운 승리였다. 슈팅수 23대2라는 기록은 축구경기에서 있어서 기록 이상의 아무 가치가 없다. 골이 중요한 것이다. 월드컵예선 한일 2차전에서 한국은 1-0으로 일본에 이겼지만 그것이 페널티킥에 의한 승리였기에 축구팬들은 한국축구의 공격력에 대해 새로운 회의를 느끼게 됐다. (중략) 양측면을 이용한 지역돌파에서 일본 골을 향해 볼을 띄우면 차범근 허정무가 이 볼을 직접 처리하든가 어시스트해주는 방법. 이 공격법을 위해 김호곤 황재만 등 양풀백이 측면공격에 가담했고 스토퍼 박성화가 공중공격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공격법은 너무도 정석대로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일본선수들은 자기들이 배운 교과서적인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한국은 난적 이스라엘과 일본의 벽을 넘어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호주 이란 쿠웨이트 등이 버틴 최종예선에서 공격력 부진으로 비판받은 한국축구가 어떤 히든 카드를 꺼내 들었는지는 다음주에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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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은 실수에서 배우고 이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경주에서는 가장 빠른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그 자리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는 자가 승리한다.

- 게리 헤빈, 잭 캔필드의《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중에서 -